마음자국

우상숭배, 과연 죄악인가?

시나위 2021. 9. 26. 13:00

2010년 12월에 쓴 글을 일부 수정하여 복구해서 올립니다.

 

먼저 이 글을 쓰는 필자는 의식세계의 상당한 부분을 불교에 뿌리 두고 있음을 밝히는 바이니 염두에 두고 읽어주길 바란다.

  


우상숭배라는 말을 참 많이 한다. 특히 기독교가 불교를 비방하면서 주로 내세우는 근거가 바로 그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모세가 유대인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는 도중 여호와에게 십계명을 받기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유대인들이 동물의 형상을 만들어 숭배하면서 타락하는 모습을 보고 우상을 숭배하는 것을 금한다. 그때부터 기독교에선 우상숭배는 최악의 죄악 중 하나다.

 

그럼 과연 우상이란 무엇일까?

우상(愚狀)이란 말 그대로 어리석은 형상이다. 어떠한 형상에 실질적인 가치이상의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왜곡된 가치체계를 유도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각 사찰에 있는 불상들은 분명 우상이다. 본질적인 시각으로 보았을 때 불상은 단순하게 돌이나 나무로 된 조각상 그 이상의 무엇도 아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앞에서 절을 한다.

 

하지만 우상의 범위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무언가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종교적인 의미는 물론이거니와 혹은 개인적인 의미를 부여하면서 무언가를 특별하게 여기는 것들은 우리의 일상에 늘 존재한다. 예를 들자면 교회당 앞쪽에 크게 걸려있는 십자가도 다르지 않다. 절을 하는가 안하는가는 의식의 표출방식의 문제일 뿐, 근본적으로 무언가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영적 의미를 부여하는 모습은 다르지 않다. 더 나아가 스님들이나 사제들이 입는 복장 또한 또 다른 우상이다. 역시 본질적인 시각으로 보면 그저 좀 다른 디자인과 색상으로 만들어진 의복일 뿐이지만 사람들은 그에 여러가지 의미를 부여하고 특별하게 대한다.

 

우상의 영역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상()을 버리라고 말한다. 이 상이란 물질적인 형상의 범주에서 더 나아가 인간의 사유에서 형성된 관념의 틀을 가리키고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만의 관념을 가지고 있다. 누구나 주변에서 그런 사람을 보았을 것이다. 별것도 아닌 것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고 혼자만의 관념에 빠져있는 사람 말이다. 지나가는 이성의 눈빛 하나에 수많은 의미를 붙이는 사람부터 흔하디 흔한 물건이 떨어진 것, 신발이 벗겨진 것등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그 모든 것이, 본질적인 시각에선 사실 어리석은 관념의 형상이다. 그리고 물질적 우상숭배 또한, 결국은 그 물질적 우상을 향한 인간의 어리석은 관념이 본질인 것이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인간도 완벽하지 않은 이상, 그 어떤 인간의 관념 또한 완전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끊임없이 관념과 관념이 충돌하며 갈등과 비극을 양산해 나가고 있다. 동물의 형상을 숭배하다 타락해 가듯, 인간은 자신들의 관념을 숭배하다 비극을 잉태한다. 역사적으로 얼마나 많은 비극들이 신앙과 이념의 이름으로 잉태되었는지 돌이켜보면, 너무나 자명해진다.

 

그런 불교는 왜 우상을 숭배하고 그 앞에서 절을 할까?

 

<출처: 진주성 지킴이회>

 

필자의 인식으론 그건 진정한 불교가 아니다. 진정한 불교는 그 모든 것을 버리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은 그 시작에 쉽게 이르지 못한다. 달을 가리키면 손가락을 보지 않고 진정 달을 볼 수 있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석가모니께서 연꽃을 들었을 때 미소를 떠올릴 수 있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이 뭣꼬!”라는 사자후에 머리에 벼락맞은 듯한 전율을 느낄 수 있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어린 아이가 걸음마를 배우기 위해선 보행기가 필요하다. 능숙하게 걸을 수 있게 된 후에는 보행기를 버려야만 하지만, 처음에는 필요한 것이다. 보행기 없어도 걸음마를 배울수 있다? 그럼 다르게 비유해보자. 바둑을 배우고자 하면 정석을 배우는 것이 필수이지만 정석을 버리지 않고선 고수가 될 수 없다. 새가 부화하기 위해선 알이 있어야 하지만, 알을 깨뜨리지 못하면 새가 될 수 없다. 나비가 되기 위해선 고치가 필요하지만, 고치를 버리지 않고선 나비가 될 수 없다.

 

불교에선 이를 일러 방편이라 한다.

  


불상뿐만 아니라 모든 법문들은 지혜롭지 못한 중생들이 걸음마를 배울 수 있도록 인도해주기 위해 만들어진 여러가지 도구들인 것이다. 하지만 궁극에 이르러는 모두 버려야 진정한 진리에 다가갈 수 있기에, 석가모니는 열반에 드시면서 "평생 단 한마디 말한적이 없다."하셨고 성철스님께선 "평생 거짓말만 했다."라고 말씀하셨다.

 

운동선수가 되기 위해선 코치의 지도아래 단단한 기본기를 갖춰야 하지만, 진정 훌륭한 선수가 되기 위해선 결국 그 틀을 벗어나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 지금의 세대에 와선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가 되어버린 인식이지만, 세상에 나와있는 많은 사상과 철학들 중 이러한 turning point를 궁극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사상을 난 오직 두 개만 만났다. 바로 불교사상과 노자사상이다. 대부분의 사상들은 언어와 관념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가르침에 머물러 있었다.

 

관념을 버린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일차적으로 위에서 설명한 인위적인 관념내지는 의미를 생각해보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그렇다 산은 그냥 산일뿐이다. “수만년 겨레를 굽어보며 민족을 품어온 아비의 품과 같은 산이 아니라 그저  일뿐이다. 물은 수천년 굽이 흘러 민족의 젖줄이 되어온 어미의 품과 같은 물이 아니라 그저  일뿐이다. 민족, 겨례, 역사. 어떻게 그렇게 큰 관념을 버리라 하는 것일까? 하지만 아무리 장엄해도 그것은 결국 인간적 관념일 뿐이다. 산악인들에게 히말라야 산맥이 거대해도 결국 지구의 자그마한 일부일 뿐인 것이다. 지구가 아무리 거대해도 우주의 먼지만한 행성을 뿐인 것이다. 그렇게 인위적 관념의 색칠을 벗겨내며 본질적인 시각을 갖춰가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혹여 민족을, 겨레를, 역사를, 지구를 우습게 보는 것이냐고 묻지는 말기 바란다. 나 자신은 그것들보다 훨씬 더 미약한 존재인데 어찌 우습게 보겠는가?

 

한편,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 추구할 수 있는 고정되고 명확한 무언가 원한다. 소위 길을 찾는다고도 말을 한다. 등대처럼 방향을 일러줄 명확한 무언가가 없으면 불안해하고 힘들어한다. 하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념들은 얼마나 정확한 것일까?

 

난 이런 비유를 생각해보았다.

  

 

운전을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도로와 차선을 따라 간다. 도로와 차선이라는 길이 있기에 그것을 따라서 목적한 곳에 도달한다. 하지만 한번쯤은 누구나 차선이 없는 공터과 같은 곳에서 운전을 해야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처음엔 대부분 도대체 어떻게 방향을 잡아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했을 것이다.

 

바로 그런 것이다. 실존적 존재 그 자체로서의 세상과 비교해보면 인간의 관념은 끝도 없이 넓은 이 세상에 그려진 차선처럼 좁은 부분일 뿐이다. 아무리 촘촘히 차선을 그어도 아무리 넓게 차선을 그어도 결코 세상을 모두 품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관념의 한계이다. “지도밖으로 행군하라.”라는 한비야씨의 말처럼 관념과 관념사이에 사각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불교는 결국 인간으로 하여금 관념을 극복하게 함으로써 유연해진 인간의 의식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가늠될 수 없는 세상의 진리와 최대한 공명하게 하려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진정으로 극복해야 할 우상은 눈앞에 보이는 물질적 형상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내 안의 관념인 것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난 우상중에서 가장 어리석고 무서운 우상은 바로 살아있는 인간을 숭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질적 우상은 아무런 의도도 가지지 않는다. 결국 숭배하는 개개인의 관념인 것이다. 하지만 살아있는 자는 의도를 가진다. 그리고 자기 내면의 관념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채 숭배되어 온 살아있는 자들의 의도는 엄청난 비극을 초래해 왔었다. 히틀러가 그러했고, 김일성이 그러했고, 고려의 신돈이 그러했으며, 중세시절의 교황들 또한 그러했다. 그리고 현재의 많은 성직자들이 또한 그러하고 있다.

 

권력은, 특히나 절대적인 권력은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절대반지와 같은 것이다. 궁극에 이르지 못한자가 절대적인 권력을 얻는다는 것은 결국 절대반지를 손가락에 끼우는 것이다. 결국 타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권력에 영혼이 먹혀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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